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란체스코 1세 스포르차 (문단 편집) === 밀라노 공작 === 1447년 [[필리포 마리아 비스콘티]]는 남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한 채 죽어버렸다. 비스콘티 공작가의 혈통이 끊어져버리니 밀라노는 당연히 극심한 혼란에 휩싸였는데, 이때 잠시 공작위가 폐지되고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들어선다.[* '암브로시아'라는 이름은 밀라노의 수호성인에서 따왔다.] 암브로시아 공화국이 들어서며 밀라노가 한참 혼란스러울 무렵, 프란체스코는 [[파비아]] 일대를 다스리고 있었는데 그때 그의 장모, 즉 필리포 마리아의 아내 아그네세 델 마이노가 프란체스코에게 공작위를 복원하는 것이 어떻겠냐고 설득하기 시작했다. 원래 밀라노 공작에 야심이 있었던 프란체스코는 장모의 지원에 힘입어 슬슬 밀라노 공략에 들어갔다. 그는 로디 지방을 포함해 여러 인근 도시들의 시뇨리아직을 맡았고, 창립된 지 얼마 되지 않아 중구난방이던 암브로시아 공화국을 대상으로 탐색전을 벌였다. 그는 베네치아와 인근 국가들과도 동맹을 맺으며 사실상 차기 밀라노 지배자로 입지를 굳혔다. 그러던 중 밀라노에 기근이 들어 공화정에 대한 시민들의 회의가 커지자, 결국 의회가 스스로 공화정을 폐지하고 공국을 복구하기로 결정하며 프란체스코를 새 공작으로 삼기로 결의한다. 스포르차는 1450년 2월 26일에 밀라노에 입성했다.[* 시민들이 뽑은 의회가 스스로 공작을 복위시키기로 결정한 사례는 이때까지 프란체스코가 유일했다.] 그는 3월 25일 즉위식을 치르고 밀라노 공작이 되었으며, 이후 이탈리아 세력 대부분이 그를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했다.[* 다만 용병 출신이던 그를 아니꼽게 보던 [[신성 로마 제국]]은 예외여서 그가 죽은 이후 1494년에야 스포르차 가문을 밀라노 공작으로 인정한다.] [[파일:241474_64103f9951a83.jpg]] [[밀라노]]의 전경 이렇게 파란만장한 인생사를 거치고 밀라노 공작좌까지 차지한 프란체스코는 확실히 [[명군]]이었다. 조세 개혁을 통해 이전과 비교가 안되는 수준의 막대한 세수를 벌어들였고, 밀라노는 그 막대한 부에 힘입어 당시 한창 찬란한 꽃을 피우고 있던 [[르네상스]]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나라가 부유해졌으니 밀라노 시민들은 당연히 그를 사랑했다. 엄청난 인기를 등에 업은 프란체스코는 1456년 밀라노에 거대한 병원을 개원하는가하면 예전에 소실됐던 궁전을 복구하고 아다 강까지 이르는 거대한 운하를 착공했다. 밀라노가 프란체스코 아래에서 전성기를 누리고 있을 무렵, 또다른 르네상스의 중심지 [[피렌체]]는 [[코시모 디 조반니 데 메디치]]가 통치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두 명지도자들이 동시에 밀라노와 피렌체를 다스리고 있었던 것. 게다가 프란체스코와 코시모 데 메디치는 상당히 친한 관계여서 처음에는 '로디 조약'을 통해 평화 협정을, 두 번째로는 '이탈리아 동맹'을 창설해 베네치아-피렌체-밀라노 이 3국 간의 평화 관계를 구축했다. 이탈리아 동맹을 통해 항구적인 평화를 정착시킨 프란체스코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 롬바르디아 동부 일대에 대한 소유권 주장을 포기했다. 게다가 악연이 있던 [[알폰소 5세]]도 이탈리아 동맹의 한 축이었기에 어쩔 수 없이 앙주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고 나폴리 왕국과 손을 잡는다.[* 앙주 가문은 꾸준하게 알폰소 5세가 불법이라 여기며 나폴리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1464년에는 앙주 가문을 완전히 척을 지고 앙주가 다스리던 [[제노바]]와 [[사보나]]를 집어삼키기까지 했다. 참고로 앞서 이탈리아 동맹을 출범시키고 분열된 이탈리아 세력들 간에 상호연대체제를 구축한 것만 봐도 프란체스코는 외교적으로는 능력이 대단히 뛰어난 지도자였다. 그는 '힘의 균형'이라는 개념을 완벽히 이해하고 있었으며 단순히 이탈리아 반도를 넘어 유럽 전체를 무대로 외교를 펼쳤던 몇 안되는 이탈리아 군주였다. 워낙에 프란체스코가 균형을 잘 맞춰놨던 덕에 이탈리아는 1400년대 내내 [[프랑스 왕국]]이나 [[신성 로마 제국]] 등의 간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로울 수 있었다. [[잉글랜드]]의 [[에드워드 4세]] 역시 프란체스코와 친해지고 싶어했고, 그에게 가터 훈장을 1463년에 수여하기에 이른다. 이렇게 많은 업적을 남겼던 프란체스코는 말년에 수족증과 [[통풍]]으로 고생했다. 1462년에는 그가 죽었다는 헛소문이 밀라노 시내에 나돌며 폭동이 일어났지만 정작 프란체스코는 멀쩡히 살아있었다고. 그는 무려 4년을 더 살아서 1466년 3월에야 사망했고 그의 아들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가 공작위를 계승했다. 훗날 밀라노 공작위를 이은 프란체스코의 아들 '루도비코 스포르차'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게 프란체스코의 무덤을 꾸밀 말 동상을 만들어달라고 의뢰했다. 다 빈치는 1492년 설계에 이용할 말 점토 모형을 완성했지만 실제로 만드는 데에는 실패했다. 이후 1999년에야 다 빈치의 설계도 그대로 청동 조각상을 만들어 밀라노의 '이포드로모 델 갈라포' 경마장 밖에 전시해놨다고 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